설교자: 포항중앙침례교회
날짜: 2026-07-26
지난 목요일부터 오늘 아침까지 교육 기관 여름 캠프가 있었습니다. 무더위에 교사들이 다음 세대를 섬기느라 고생을 참 많이 했는데요. 예, 섬김과 수고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공동체를 영적으로 이렇게 세우는 전교인 여름 수련회가 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열심히 여러분도 기도하고 또 준비하고 계실 텐데요. 이번 수련회를 준비하는 제 마음은 많이 간절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반응하지 않는 지체들이 이전보다 더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멈춘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이들이 있고, 자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자라야 할 이유를 갖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고, 아예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갈 마음이 없고 자기 방식대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사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되나 깊이 권해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 우리 공동체는 세상에 밀릴 건지 다시 반전에서 밀고 나갈 것인지의 기로에서 있습니다. 말씀에 반응하지 않은 사람이 많아지는 건 지금 우리 공동체의 영적인 상태가 안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더 밀리면 완전히 무너집니다.
자, 이런 모습을 보면서 제 안에 생기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이 사람들이 다 교회 안에 있어요. 말씀도 들어요. 예배도 드려요. 근데 말씀의 영향은 전혀 안 받아요. 뭔가 문제가 생긴 게 사실입니다. 이게 정상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일단 하나님 말씀에는 문제가 없어요. 문제는 말씀을 전하는 처나 말씀을 받는 여러분에게 있을 거예요. 말씀을 전하는 사람에게서 생기는 문제는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성령 충만하지 못해서 은혜의 통로가 되지 못할 때 생기는데,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이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기도와 말씀의 자리에서 저를 살피려고 노력을 합니다. 일단은 제 책임이 크겠죠. 그러나 제가 양심의 부끄러움 없이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상태는 공동체가 죽고 사는 문제임을 알기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깨어서 성령 충만한 은혜의 통로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또 하나는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서 생기는 문제인데요. 말씀을 받는 사람에게 생기는 문제는 많겠지만 가장 큰 건 이겁니다. 말씀을 간절함으로 전심으로 받지 않는다는 거예요. 듣는데 안 듣는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아예 믿지 않으니까 뭐 관심이 없어서 말씀을 간절함으로 받지 않는 일은 충분히 일어납니다. 근데 문제는 신앙생활의 방식을 본인이 정해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안 받는 거, 이게 진짜 문제예요. "난 요렇게 하겠다. 난 요까지만 하겠다." 본인이 정해놨어요. 그 이상은 어떤 말씀을 해도 안 들어요. 여러분, 신앙생활의 방식과 수준을 내가 정하면 말씀이 당연히 안 들리죠. 그리고 그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으면 은혜를 받기보다는 불평이 많습니다. 그리고 시험될 때가 훨씬 더 많아요.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마다 마음에 불평이 생기고 화가 나고 그다음에 시험에 든다면 말씀에는 문제가 없어요. 내 마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바로 사사에서 나오는 자기 소견에 좋은 대로 하는 거예요. 여러분, 소견에 좋은 대로 신앙생활한다는 자체는 이미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그건 길이 아닙니다. 여러분, 길을 잃은 게 뭔지는 제가 수련회 때 잘 정리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콧방귀] 여러분,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예요. >> 아멘.
여러분,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면 왜 문제가 됩니까? 소견에 옳은 대로 살 때 생기는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신앙생활 내 소견에 오른 대로 할 수 있어요. 그건 일단 본인의 선택입니다. 음. 그런데 여러분이 소견에 옳은 대로 신앙생활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은 하나님 앞에서 봐서는 지워진 시간이에요. 사라진 시간입니다. 주님 앞에 나가서 결산하면 그 대목은 그 구간은 없습니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을 갖고 사는 우리에게 성경은 세월을 아껴라. 다른 말은 기회를 사라는 말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사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간절함으로 받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기회를 사는 것이고 그 삶은 하나님 나라에 가도 지워진 구간이 아니에요. 살아 있는 구간이 되는 거예요. >> 아멘.
그러나 내가 방식을 정해 놓고 말씀의 귀를 닫고 듣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으면 기회를 놓치고 하나님 앞에 가면 그 구간은 지워집니다. 지워진 구간이 되는 거예요. 여러분, 성경에도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 말씀 앞에 섰지만 불순종함으로 기회를 놓쳤습니다. 하나님은 이때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렸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길갈에서 제사를 지낼 때 사무엘을 기다리지 못하고 본인이 제사를 했죠. 그때 하나님 말씀하셨어요. "내 날이 길지 못할 거다." 기회를 놓쳤어요. 아말렉을 진멸해라. 또 기회를 놓쳤어요.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버렸다." 광야 1세대도 가나안을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 앞에 섰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함으로 기회를 놓쳤습니다. 못 들어갔죠. 죄에 빠진 유다 백성도 선지자를 통해서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섰어요. 그들은 말씀을 버렸습니다. 안 들었어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기회를 산 사람도 많아요.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기회를 샀어요. 야곱은 밭 아람에서 하나님이 돌아가라고 했을 때 돌아갔습니다. 기회를 샀어요. 모세도 순종해서 홍해를 건넜어요. 기회를 산 거지요. 여호수아도 순종해서 요단을 건넜습니다. 또 하나님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여리고성을 순종하며 하하며 돌았어요. 교회를 산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세월을 아끼는 거예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기회를 사는 것입니다. >> 아멘.
여러분, 하나님 말씀은 전심으로 받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말씀을 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함으로 불순종이 굳어져 가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어요. 속에 경일기 같습니다. 아무리 말씀해도 상관없어. 그냥 자기 길로 가요. 이건 개인의 인생의 위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 공동체의 위기라고도 봐야 합니다. 지난주까지 우리는 지난주에 도아지라 교회의 변질되고 타협하는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계시록 2장 14절 15절인데요. 일진학겠습니다. 자, 암모 교회는 발람의 교훈을 받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처럼 니골라당의 교훈을 받아들였어요. 15절 말씀을 보세요. 저는 사실은 이 말씀이 굉장히 충격이었어요. 한번 읽어 볼까요? 15절 시작. "이와 같이 내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 내게도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니골라당의 교훈이 뭡니까? 우상의 재물을 먹어도 된다. 영적 육적 음행을 저질러도 된다는 교훈인데, 이거는 교회가 지킬 수 없는 내용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니골라 버가모 교회는요. 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어요. 이 말은요. 약해서 실수를 한 게 아니고 니골라당의 교훈이 옳다고 믿고 따라갔다는 거예요. 마치 바을 따라간 이스라엘과 똑같은 건데요. 근데 생각해 보세요. 순교의 각오로 주님을 따랐던 버가모 교회가 어떻게 이 말도 안 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킬 수가 있었을까요? 정말 이스라엘은 칼에 무너지지 않았어요. 모압의 축제 초대받아 밥 안께 얻어 먹는 사소한 것에서 가서 우상숭배하고 음행을 함으로 무너졌는데요. 버가모 교회도 그렇게 무너졌어요. 이 시대 교회도 그렇게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예외는 아니에요. 우리 중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을까요? 니골라당의 교훈. 여러분, 물론 우상의 신전에 가서 우상의 재물을 먹고 신전 사제와 의명을 하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우리 교회 안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버가모 교회가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켰다는 게 엄청 충격이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 교회 안에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건 너무나 충격일 수 있지만 세상과 타협하고 만모 신을 섬기고 쾌락을 추구하고 자기 소견에 오른 대로 가도 된다고 생각하는 이 사람들이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에요. 내가 잘 가고 있는지 그래서 언제나 하나님 말씀 앞에서 돌아보고 돌아보고 돌아봐야 됩니다. >> 아멘.
저는 오늘 디모데 말씀으로 포중 공동체를 향해 다시 한번 간곡히 권면하려고 합니다. 기도하는 것은 오늘 말씀이 들리기를 바랍니다. >> 아멘. 들려야 합니다. 우리의 기본 자세는 말씀을 내려놓고 내 생각대로 가는 게 아니고 내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 말씀대로 가는 거예요. >> 아멘. >> 이런 삶의 태도를 회복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자, 설교 제목 읽어 봅니다. 시작. 아멘.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영적인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그의 유언과 같은 편지인데요. 고난을 이겨야 된다. 진리를 지켜야 된다. 목회자로서 사명을 잘 감당해야 된다는 내용들을 애하게 그리고 강렬하게 당부하는 편지입니다. 바울의 투옥과 순교 과정을 잠깐 살펴보면 AD 57년에서 58년 경에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체포가 됩니다. 그리고 로마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AD 60년에서 62년 사이에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상태에서 2년간 지내면서 찾아오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요. 이 시기에 기록된 서신서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입니다. 재판 결과 무죄로 석방이 되어서 62년에서 64년 경에 그는 아시아와 서바나, 스페인으로 마지막 전도 여행을 떠났고 이때 지필한 서신이 에베소에 남겨둔 디모데에게 디모데 전서를 보내고 그레데섬에 남겨둔 디도에게 디도서를 기록해서 목회를 격려했습니다. 이때 64년경에 로마 시내에 대화제가 발생해서 민심이 극도로 악화되었을 때 내로왕제가 정치적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기독교인을 방화범으로 침목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향해서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습니다. 근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어요. 그리고 66년에서 67년 사이에 바울도 체포됩니다. 마메르틴 감옥으로 추정되는 로마의 감옥에 갇히게 되고 최종 사형 선고를 받고 AD 67년 경에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기 때문에 십자가형이 아니라 참수형을 당함으로 영광스러운 순교의 잔을 마셨는데요. 바로 이곳에서 이 감옥에서 그 유언과 같은 바울의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 후서를 기록했어요. 그러니까 디모데 후서는 죽음이 임박함을 직감하는 노사도가 믿음의 길을 걸어갈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교회에 대한 사랑과 아픔이 묻어 있는 유언과 같은 말씀이기 때문에 한 말씀 한 말씀 무게감을 가지고 읽어 내려가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기질을 알고 있어요. 소심하기 때문에 쉽게 두려움에 휩싸인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1장의 말씀을 통해서 디모데를 격려하고 자꾸만 자꾸만 식어져 내리는 디모데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붙여 주신 은사의 불을 다시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 1절을 봅니다. 시작.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 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얼마 안 있으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을 본인이 직감하고 있어요. 그 점에 아들에게 보낸 편지 속에 자기를 이렇게 소개하죠.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자다. 이 말은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도 자기가 누구인지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거예요. 나는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이 보내셔서 사도가 된 자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도 이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세상에서는 사장, 부장, 전문인, 직장인, 뭐 교회 안에서 목사, 집사 이런 정체를 가질 수 있지만 우리의 정체는 세상의 신분이나 지위나 능력에 근거한 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부르셨고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라는 세상 사람과는 다른 정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아멘. 지위를 갖고 있고 능력이 있으니까 교만하고 그런 게 없으니까 비굴하고 이게 아니라 나는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정체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 아멘. 이 정체를 갖고 있어야 어떤 고난과 어려움과 힘듦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가 있어요. 이런 얘기도 되죠.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잖아요. 내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사도가 된 것처럼 너도 하나님의 뜻으로 복음의 사역자로 부름을 받았고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으니 너 인생 붙드실 거다. 두려워하지 마라. 담대해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너도 하나님이 부른 사람이야. 두려워하지 마. 담대. 여러분, 나를 부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2절입니다. 읽어봅니다. 시작.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되게 있을지어다." >> 디모데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았어요. 길렀어요. 그래서 믿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평생 바울의 동력자였습니다. 2차 전도 여행 때 그저에 있는 성도들에게 칭찬을 받는 신실한 제자로 자라 있었던 디모데를 바울은 2차 선교 여행 때부터 동행을 시켜요. 디모데전서 1장 2절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 안에서 참 아들된 디모데" 이렇게 말을 해요. 그런데 순교 직전의 유언과도 같은 디모데 후서에서는 이렇게 말하지요.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 바울은요. 자신이 개척한 교회에 문제가 생길 때마다 디모데를 보내요. 디도를 보내요. 근데 정말 바울과 똑같은 마음으로 교회를 세우는 일에 보낼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그중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 디모데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이렇게 말하죠. 바울은 디모데의 위장병을 납니다. 내 성격 때문에 잘 기가 죽고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그걸 깊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서승이자 영적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늘 눈물로 기도했어요.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다가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렇게 보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속히 와라." 이렇게 말해요. 보고 싶다 이거죠. 음. 복음을 위해서 살았지만 오랫동안 떨어져 살았어요. 여러분, 바울이 살아 있을 때 가장 마지막 편지가 디모데에게 보내졌어요. 가장 마지막으로 보고 싶다 와라 말한 사람이 디모데였어요. 바울의 마음속에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가 이걸 봐도 알 수가 있지요. 이 관계는 하늘이 내린 관계가 아닙니다. 만들어진 관계예요. 우리도 사랑하고 신뢰하고 염려하고 보고 싶은 기도해 주는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여기 앉아 있는데 남처럼 상관없는 존재로 앉아 있으면 안 되고요.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처럼 연결되고 삼겹줄이 되고 오겹줄이 되는 관계의 축복을 교회 안에서 누려야 합니다. >> 아멘.
어떻게 이 관계를 누릴 수 있나요?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 너희를 낳았다." 이렇게 말해요. 복음으로 나왔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 다 여러분을 낳아준 부모가 있지요. 그냥 이 세상에 오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우리를 낳아준 부모가 존재하는 것처럼 위로부터 태어나도록 해산에 수고를 해 준 부모가 있어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영적으로 태어나도록 해산의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여러분의 부모는 누구입니까? 영원히 태어나게 하는 해산의 수고와 자하게 해주는 돌보는 일을 할 때 영적으로도 아비와 자식의 관계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관계를 만들어 가시기를 바랍니다. 이 관계 안에 들어와야 신앙이 자랍니다. 바울은 모든 상황을 넉넉히 감당하게 하는 1절에서 2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내게 있을지어다." 축복해요. 우리 주님에게 있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있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
3절입니다. 시작. "내가 밤낮 고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오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바울은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에서도 디모데를 향한 사랑과 염려로 밤낮 중보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해요. "너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내가 너를 기억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응원하고 있으니까 디모데야 힘내라. 참 아름다운 관계죠. 두 사람은 나비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디모데가 어떻게 했길래 바울은 이렇게 디모데를 생각하고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었을까요? 바울 주변에도 사람이 많았어요. 떠나간 사람도 많았어요. 빌립보서 2장 21절 22절 한번 볼까요? 시작. "그들이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 네. 어쩌면 이것은 바울의 분념과도 같아요. 대부분의 사람이 자기를 구합니다. 하나님 말씀 전해 줘도 바빠서 못 합니다. 아, 나 이런 일이서 못합니다. 저래서 못합니다. 그랬는데요. 디모데는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했어요. 이런 디모데를 바울은 늘 기도하고 이 디모데의 존재 때문에 하나님께 늘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아갈 때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고 생각할 때마다 감사하고 아비에게 함과 같이 복음을 위해 수고하는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우리 모두의 목장 가운데서 생겨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 아멘.
4절을 봅니다. 시작. "내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 바울은 4절에서요. 너 보고 싶다 얘기하는 거예요. 음. 백마디 미사일고보다 바울의 진심이 담긴 얘기입니다. 너 보고 싶다. 나는 네 눈물을 생각하고 있다. 이렇게 말해요. 여기서 말하는 디모데의 눈물은요. 바울이 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던 중에 밀레도에 들러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다 불러요. 설교하고 작별 인사를 합니다. 이렇게 말해요.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거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얘기를 듣고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과 그 당시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였던 디모데가요. 끌어안고 굉장히 많이 울었어요. 바울은요. 그때 네가 흘린 눈물을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거예요. 음. [목을 가다듬음] 소심한 성격인데 너무 젊었어요. 에베소 교회 안에 거짓 교사들 이단 사상 박해로 굉장히 흔들리고 있는데요. 이런 교회를 디모데가 끌고 가야 돼요. 이 사역의 무게감. 그리고 영적 아버지를 오늘 마지막으로 본다는 사실 때문에 많이 울었던 것으로 보여요. 너무 서운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많이 울었어요. 바울은 차가운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면서도 그걸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나 너무 보고 싶다. 복음 안에서 맺어진 너무나 아름다운 관계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이런 아름다운 관계를 다 갖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혼자 교회 와서 예배드리고 집에 가고 이게 아니고요. 교회는 기본으로 연결입니다. 연결이에요. 아름답게 연결되고 보고 싶어하고 눈물 흘리고 기도하고 염려하고 이런 관계로 엮어진 데가 교회입니다. 여러분 >> 아멘 >>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5절입니다. 시작. "이는 내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내 외조모 로이스와 내 어머니 유니의 속에 있더니 내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이 디모데를 보고 싶어한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네 안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렇게 계속 이렇게 말하죠. "이 믿음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내 어머니 유니의 속에도 있었는데 나는 그 믿음이 네 안에도 있다는 걸 확신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바울 일행은 1차 전도 여행 중에 루스라에 들러서 발을 서지 못하는 한 사람을 고쳐요. 이 놀라운 광경을 보고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신이라고 말하면서 바울에게 바나바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한신이 말렸어요. 그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을 모함하고 그리고 루스라에 있는 사람을 충동해서 바울을 돌로 쳤어요. 다 죽은 줄 알았어요. 성 밖에 갖다 버렸어요. 1차 여행 때요. 외할머니 로이스, 어머니 유니가 디모데가 유대인이잖아요. 율법을 지키고 있었는데요. 바울의 설교를 듣고 회심했을 걸로 봐요. 그리고 2차 때 바울이 루스라를 다시 방문했어요. 그때 할머니와 로이스와 유니가 디모데를 복음사역에 드렸어요. 그래서 바울에게 이 아이를 데리고 가서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함께 써 달라고 보냈단 말이에요. 근데 보세요. 루스라에서 1차 때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서 거의 죽는 것을 로이스와 유니가 봤나요? 못 봤나요? 다 봤어요. 복음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는 걸 다 봤다는 거예요. 그런 바울에게 자기 아들과 손자를 맡긴다는 의미가 뭔지 알겠어요, 모르겠어요. 아, 우리 아들, 우리 손자도 저렇게 죽을 수 있겠다. 그거 충분히 알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 사역을 위해서 드렸어요. 바울은 그 할머니와 어머니의 믿음을 보면서 하는 얘기가 너희 할머니와 너희 어머니에게 거짓이 없는 진짜 믿음을 받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믿음이 나는 네 안에도 있다는 걸 확신한다.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로이스와 유니 같은 믿음의 부모가 있을 때 디모데 같은 믿음의 사람이 나온단 말이에요. 오늘날 복음을 위해서 자식을 드리는 거 힘들어하는 부모가 너무 많지 않습니까? 못 보낸다고. 선교사 절대 안 된다고. 여러분, 교회 중직자들이 더 반대합니다. 이런 얘기입니다. 나는 내가 지금 힘들어서 두려워하고 있지만 너에게 거짓이 없는 믿음의 불씨가 있다는 걸 확신한다 이거야. 디모데야, 네 안에 믿음이 있어. 이렇게 말해 주는 거예요. 음. 오늘 여러분 안에도 그 믿음이 있는 줄을 제가 믿습니다. 믿음이 살아나면 되는 거예요. 네 >> 안에도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다는 걸 내가 확신한다. 얼마나 큰 격려예요? 저는 여러분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 아멘.
6절입니다. 시작.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부릴 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 이전에 디모데를 사역자로 세울 때 안수를 했어요. 장로의 회에서 그때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가 있었는데 내가 보니까 그 은사의 불이 꺼졌다. 나는 다시 그걸 붙이고 싶다. 그렇게 하는 거, 그때 네가 장로에서 안수를 받을 때 네 안에 불붙었던 그 은사 꺼져버렸지만 나는 다시 불붙이고 싶다. 불일듯하게 한다는 헬라어는요. 아저 필요라는 말인데요. 불을 다시 집힌다. 불을 다시 붙인다. 그런 뜻이에요. 혹시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약해지고 열정이 시어가고 믿음의 불이 꺼져가고 있지 않습니까? 은사는 한번 받았다고 영원히 저절로 타오르지는 않아요. 우리가 영적으로 게으르거나 세상과 타협하거나 두려움에 떨면 은사의 불이 꺼져버립니다. 꺼져버려요. 여러분이 공동체 안에 두르면 꺼진 불이 붙어야지 여기만 두르면 꺼져버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불 꺼지면 안 돼요. 저는 우리 중에도 은사의 불이 꺼진 사람도 있고 꺼져가는 사람도 있어요. 왜 불이 꺼질까요? 우리가 세상과 타협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고 하나님 말씀과 상관이 없이 내가 만든 길을 고집하고 말씀을 받지 않고 말씀을 쉽게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은사의 불이 꺼져가는 거예요. 이불이 꺼지면요. 영적인 침체가 와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말씀 무시합니다. 순종하지 않아요. 말씀으로 인한 변화가 사라집니다. 대신 생겨나는 것, 원망, 불평, 자아가 죽지 않습니다. 교회가 싸움터로 변합니다. 관계 깨집니다. 권위를 무시합니다. 질서가 무너져요. 불 꺼진 교회는요. 감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자폭하는 겁니다. 불이 꺼지면요. 교회는 자폭합니다. 성령의 불이 식어지는 근본 원인은 우리 마음 안에 있어요. 성령님에게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죠. 성령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하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기준을 따라가면서도 우리의 착각이 삼손처럼 하는 거예요. 여전히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신다. 힘을 떨치리라. 힘이 없어요. 불 꺼지면 사역이 힘겨워집니다. 사람이 두려워집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정에서 관계가 악화되는 일이 일어나요. 저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잘 돌아보게 되기를 바랍니다. >> 아멘.
불 꺼진 것보다 더 위험한 게 있어요. 그게 뭔지 아세요? 꺼진 상태에 적응하는 거예요. 식어진 상태에 적응하는 겁니다. 성령의 불이 꺼지고 식어진 상태가 지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적응을 해요. 그 불이 없는 상태를 정상으로 느끼게 돼요. 처음에는 당황스럽지요. 근데 계속 그렇게 하다 보면 아, 원래 신앙생활 이렇게 하는 거구나라고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예요. 비정상이 정상으로 느껴져요. 그러다 보면 은혜 받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이상해요. 복음을 위해 헌신하는 게 이상해요. 고난을 감내하고 주님을 따라하는 게 이상해요. 예배 중에 거기 아멘하면 죄 왜 저래? 이런 표정을 하신단 말이야. 그다 왜 그런지 아세요? 비정상이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면 정상으로 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보이는 거예요. 정상이 비정상으로 비정상이 정상으로 느껴지는 것은 정말 무서운 상태입니다. 기도하는 게 정상. 성경 안 읽는 게 정상. 예배 빠져 먹는 게 정상. 여러분 이게 정상입니까? 여러분 혹시 영혼을 위한 헌신과 희생 그리고 순종이 없는 비정상이 정상으로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변화가 없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사랑과 용납이 없고 하나님의 사람답지 못하고 나의 노력 그 이상의 어떤 역사도 나타나지 않는 게 정상으로 보이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사역에는 우리의 노력과는 비교가 안 되는 열매가 있어야 됩니다. >> 아멘. 우리 노래가 마음껏 하나님 필요가 있습니다.